고다이쇼 미나모토 요리토모가 소물자정을 보내 고려를 노략질하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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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다이쇼 미나모토 요리토모가 소물자정을 보내 고려를 노략질하게하다. ==테마 음악====== https://youtu.be/a6GaKDj_JLA?si=zCZ4aIxdGBID1rAL&t=178 ============== 고다이쇼(右大將)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賴朝)가 소물자정(小物資政)을 보내 고려를 노략질하게하다.  // 고려관련 일본사료 > 아즈마카가미(吾妻鏡) > 고려를 정벌했었다는 장수를 사로잡다 고려를 정벌했었다는 장수를 사로잡다 준토쿠 덴노(順德天皇) 겐랴쿠(建曆) 3년 5월 3일 계묘(癸卯) 검색결과 보기 이전 검색결과 다음 검색결과 상위로 가기 이전으로 가기 다음으로 가기 출전(자료명) 아즈마카가미(吾妻鏡) 연대 정보 1213년(고려 강종 2) 5월 3일(음) / 1213년 5월 24일(양) 연관 고려측 기록 개요  이 자료는 1213년(고려 강종 2)의 기록으로 호조(北條) 정권 시기에 아사이 사부로 요시히데(朝夷三郎義秀, 혹은 아사히나 사부로 요시히데(朝比奈三郎義秀))에게 토벌당한 진제이(鎭西) 사람 소물자정(小物資政)이 죽은 고다이쇼(右大將)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賴朝) 때에 고려를 정벌한 대장군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요시히데는 아버지 와다 요시모리(和田義盛)와 함께 호조 도키마사(北條時政)에 투항하였었는데, 1213년(겐랴쿠(建曆) 3)에 반란을 일으켰다가 처절하게 패배하여 멸문당하였다. 『조쿠혼초쓰간(續本朝通鑑)』 준토쿠 덴노(順德天皇) 겐랴쿠(建曆) 3년 5월 3일 기사에서【연관사료】 쓰시마 사람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와다 요시모리의 아들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요시히데는 바다를 건너 고려의 부산포(釜山浦)로 도망쳐 갔다. 그런데 그곳 사람들이 요시히데의 용맹함에 탄복하여 그가 죽은 후에 신사(神社)를 세워주었으며, 조이명사(朝夷名社)로 불렀다는 것이다. 요시히데가 부산포로 왔다는 쓰시마의 전승을 사실로 보기는 어렵지만, 일본의 규슈나 쓰시마 지역이 한반도 남부와 적지 않게 교역이나 인물 교류를 ...

대마도 지방장관 등원친광이 타이라를 피해 고려로 도망갔다가 돌아오다.

대마도 지방장관 등원친광이 타이라를 피해 고려로 도망갔다가 돌아오다. //사료 : 오처 경(아즈마 카가미) 고려관련 일본사료 > 아즈마카가미(吾妻鏡) > 쓰시마의 지방장관이 난을 피해 고려로 가다 쓰시마의 지방장관이 난을 피해 고려로 가다 고토바 덴노(後鳥羽天皇) 겐랴쿠(元曆) 2년 5월 23일 정사(丁巳) 검색결과 보기 이전 검색결과 다음 검색결과 상위로 가기 이전으로 가기 다음으로 가기 출전(자료명) 아즈마카가미(吾妻鏡) 연대 정보 1185년(고려 명종 15) 5월 23일(음) / 6월 22일(양) 연관 고려측 기록 개요  이 자료는 1185년(고려 명종 15)에 쓰시마의 지방장관[對馬守] 후지와라노 지카미쓰(藤原親光)가 헤이시(平氏)의 공격을 우려하여 고려로 도망갔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지카미쓰가 도망하자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賴朝)가 쓰시마 슈고닌(守護人) 가와치 요시나가(河內義長)로 하여금 빨리 귀국할 것을 종용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아즈마카가미(吾妻鏡)』 고토바 덴노(後鳥羽天皇) 겐랴쿠(元曆) 2년 6월 14일 기사에【연관사료】 지카미쓰가 일본으로 귀환할 때 고려 국왕이 공선(貢船) 3척에 귀한 보물을 실어 보냈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 배는 고려에서 일본에 보낸 공선(貢船)이라기보다는 고려를 왕래하던 쓰시마의 진봉선(進奉船)으로 추정되며, 배에 실은 보물 역시 쓰시마의 진봉에 대한 답례에 해당하는 회사품(回賜品)으로 볼 수 있다. 아울러 예전부터 쓰시마 상인을 비롯한 규슈 사람들이 고려의 김해(金海)를 왕래한 것으로 보아, 지카미쓰가 도망쳐 온 고려 지역은 김해[金州]일 가능성이 있다.  한편, 원문에는 23일 정사(廿三日丁巳)로 기록되어 있으나 1185년 5월 23일의 간지는 을사이다. 원문 廿三日丁巳. 參河守 範賴受二品之命, 爲對馬守親光迎, 可遣船於對馬嶋之處, 親光爲遁平氏攻, 三月四日渡高麗國云々, 仍猶可遣高麗之由, 下知彼嶋在廳等之間, 今日卽遣之, 當嶋守護人河內五郞義長同送狀於親光, 是平氏悉滅亡訖, 不成不審, 早可令歸朝之趣...

일본 기록 고콘초몬주의 충격적 기록. 미나모토 요리토모가 고려를 정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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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기록 고콘초몬주의 충격적 기록. 미나모토 요리토모가 고려를 정벌하다 정도전의 군제 개혁 상소에서 뜻하지않게 나타난 역사의 비밀..., 고려 말 조선 초 외의 다른 고려시대에도 일본군의 침입이 있었다고 말하는듯한 정도전 ===테마 음악======== https://youtu.be/a6GaKDj_JLA?si=zPlZCBZz4PkixzAp ================== // 태조실록 5권, 태조 3년 2월 29일 기해 5번째기사 1394년 명 홍무(洪武) 27년군제 개정에 관한 판의흥삼군부사 정도전의 상서문국역원문.원본 보기 판의흥삼군부사(判義興三軍府事) 정도전(鄭道傳) 등이 상서(上書)하였다. "예로부터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은 문(文)으로써 다스림을 이루게 되고, 무(武)로써 난리를 평정하게 되니, 문무(文武) 양직(兩職)은 사람의 두 팔과 같으므로, 한 쪽만을 두고 한 쪽은 버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본조(本朝)에는 이미 백사(百司) 서부(庶府)가 있고, 또 제위(諸衛) 각령(各領)이 있으니, 문무(文武)의 관직을 귀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병(府兵)의 제도는 대개 전조(前朝)의 그전 것을 계승하였는데, 전조의 성시(盛時)에도 다만 부병(府兵) 외에 다른 군호(軍號)는 없었기 때문에, 북쪽에는 큰 요(遼)나라가 있고 동쪽에는 여진(女眞)과 일본(日本)이 있어 밖에서 침략(侵掠)했으며, 또 초적(草賊)이 있어 때때로 나라안에서 도둑질하니, 사건이 작으면 중랑장(中郞將) 이하를 보내고, 사건이 크면 상장군(上將軍)과 장군(將軍)을 보내어 이를 방어하게 하고, 부득이한 경우에 이르게 된 뒤에는 군현(郡縣)의 군사를 징발하여 밖의 적을 공격하고 안의 국토를 지키게 하여 4백여 년이나 전하여 왔으니, 그 당시 부병(府兵)의 강성(强盛)함을 알 수가 있습니다. 사변(事變)이 없으면 병법(兵法)을 익히게 하고, 사변이 있어 군대를 출동시키면 반드시 오진(五陣)으로 하였으니, 그 당시 병법의 익힘도 또한 알 수가 있습니다. 충렬왕(忠烈王)이 원(元)나...

키소 요시나카

  미나모토노 요시나카  최근 수정 시각: 2023-04-13 17:07:02 분류 1154년 출생1184년 사망헤이안 시대/인물카와치 겐지종4위란잔정 출신 인물전쟁 사망자화살에 죽은 인물 미나모토노 요시나카 源義仲 미나모토노 요시나카 출생 1154년 사망 1184년1월 20일 참전 겐페이 전쟁 1. 개요 2. 생애 2.1. 출생 2.2. 거병 2.3. 카와치 겐지의 불안한 동맹 2.4. 쿠리카라 고개의 싸움 2.5. 헤이케의 교토 탈출 2.6. 기소 요시나카의 상경 2.7. 미즈시마 전투 2.8. 홋슈지 전투 2.9. 우지가와 전투 2.10. 요시나카의 최후 3. 평가 4. 기타 5. 창작물에서 1. 개요[편집] 헤이안 시대 말기의 무장. 통칭 기소 요시나카(木曽義仲) 또는 아사히노[1] 쇼군(朝日将軍 또는 旭将軍)으로 불린다. 겐페이 전쟁에서 활약했으며, 호쿠리쿠(북륙) 지방에서 거병하여 카와치 겐지 측에 선 무사들을 이끌고 헤이케를 교토(당시 일본의 수도)에서 쫓아내는 큰 공적을 세웠다. 하지만 고시라카와 법황, 그리고 가마쿠라의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와 대립하면서 입지가 약화되었다. 결국 요리토모의 대군을 이끈 미나모토노 요시츠네에게 패배하여 죽었다. 2. 생애[편집] 2.1. 출생[편집] 미나모토노 요시나카는 세이와 겐지의 본가인 미나모토노 타메요시(源為義, 1096 ~ 1156)의 차남 미나모토노 요시카타(源義賢, ? ~ 1155)의 차남으로 1154년에 태어났다. 미나모토노 요시카타의 형은 미나모토노 요시토모(源義朝, 1123 ~ 1160)였는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와 미나모토노 요시츠네의 아버지였다. 즉, 요시나카는 요리토모, 요시츠네 형제의 사촌이었다. 《존비분맥》(尊卑分脈)이라는 책에 따르면 요시나카의 어머니는 유녀(창녀, 기생 등)였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요시나카가 태어난 이듬해인 1155년 8월 16일, 요시나카의 아버지 요시카타는 무사시국 히키군(武蔵国比企郡)[2]에 있는 오오쿠라(大倉)의 저택에서 형 요시토모(義朝)의 장...

타이라 클랜 (=헤이케=헤이시)

  User Taira 平氏 Mon: Agehachō, the Swallowtail butterfly Home province Hitachi Province, Ise Province Parent house Imperial House of Japan Titles Various Founder Taira no Takamochi Final ruler Taira no Munemori Founding year c. 825 Cadet branches Hōjō Chiba Miura Nagao Uchima Tajiri Hatakeyama Oda Tanegashima others // 한글로 번역해줘 ChatGPT 타이라 平氏 문장: 아게하초, 제비나비 본토 지역: 히타치 현, 이세 현 모계: 일본의 황실 칭호: 다양함 창시자: 타이라 노 타카모치 마지막 지도자: 타이라 노 무네모리 창립년도: 약 825년 계열 가지: 호조 치바 미우라 나가오 우치마 타지리 하타케야마 오다 타네가시마 그 외 다른 가지 GPT-4 User The Taira (平) was one of the four most important clans that dominated Japanese politics during the Heian, Kamakura and Muromachi periods of Japanese history – the others being the Minamoto, the Fujiwara, and the Tachibana.[1] The clan is divided into four major groups, named after the emperors they descended from: Kanmu Heishi, Ninmyō Heishi, Montoku Heishi, and Kōkō Heishi.[2] The clan is commonly referred to as Heishi (平氏, "Taira clan") or Heike (平家, "H...

서기 1180년 후지 강 전투 (후지가와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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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기 1180년 후지 강 전투 (후지가와 전투) GPT-4 User The Battle of Fujigawa (富士川の戦い, Fujigawa no tatakai) was a battle of the Genpei War of the Heian period of Japanese history. It took place in 1180, in what is now Shizuoka Prefecture. Background Minamoto no Yoritomo, using Kamakura as his headquarters, sent his counselor Hōjō Tokimasa in August 1180 to convince the warlords Takeda of Kai and Nitta of Kotsuke to follow Yoritomo's command as he marched against the Taira.[1] As Yoritomo continued through the region below Mount Fuji and into Suruga Province, he planned a rendezvous with the Takeda clan and other families of the provinces of Kai and Kōzuke to the north. These allies arrived at the rear of the Taira army in time to ensure a Minamoto victory.[1]  Battle During the night, Yoritomo launched an attack against the large Taira army camp. The Taira became alarmed when a flock of waterfowl flew over their camp, and the "small surprise became a rout".[attribution needed][2][3][4] ...

겐페이 전쟁의 최절정 전투 '단노우라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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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_일본 위키백과 '단노우라 해전' English: "Translation_Japanese Wikipedia 'Battle of Dan-no-ura'" Japanese: "翻訳_日本のウィキペディア '壇ノ浦の戦い'" Chinese: "翻译_日本维基百科 '壇之浦之战'" Vietnamese: "Dịch_Bách khoa toàn thư Wikipedia tiếng Nhật 'Trận Dan-no-ura'" // Model: GPT-4 User [壇ノ浦の戦い : 壇ノ浦の戦い(だんのうらのたたかい)は、平安時代の末期の元暦2年/寿永4年3月24日(1185年4月25日)に長門国赤間関壇ノ浦(現在の山口県下関市)で行われた戦闘。栄華を誇った平家が滅亡に至った治承・寿永の乱の最後の戦いである。 背景 寿永2年(1183年)7月、比企能員も源氏に加わり、源義仲に攻められた平氏は安徳天皇と三種の神器を奉じて都を落ちるが、その後の鎌倉政権の源頼朝と義仲との対立に乗じて摂津国福原まで復帰した。しかし、寿永3年/治承8年(1184年)2月の一ノ谷の戦いで大敗を喫して海に逃れ、讃岐国屋島と長門国彦島(山口県下関市)に拠点を置いた。 鎌倉政権は頼朝の弟範頼に3万騎を率いさせて山陽道を進軍して九州に渡り平氏軍の背後を遮断する作戦を実行する。だが、範頼軍は兵糧の不足と優勢な水軍を有する平氏軍の抵抗によって軍を進められなくなった。この状況を見た義経は後白河法皇に平氏追討を願い許可を得ると都の公家達の反対を押し切って屋島へ出撃した[注 1]。元暦2年/寿永4年(1185年)2月、義経は奇襲によって屋島を攻略(屋島の戦い)。平氏総大将の平宗盛は安徳天皇を奉じて海上へ逃れて志度に立て籠もったが、そこも義経軍に追われ、瀬戸内海を転々としたのち彦島に拠った。 一方、範頼軍は兵糧と兵船の調達に成功して九州に渡り、同地の平氏方を葦屋浦の戦いで破り、平氏軍の背後の遮断に成功。平氏軍は彦島に孤立してしまった。 合戦の経過 鎌倉幕府編纂の歴史書である『吾妻鏡』には壇ノ浦の戦いについては元暦二年三月二十四...